농사하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서 왕자(王者)가 정치에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진실로 인사(人事)를 다하였다면 비록 천운이 동반되지 않더라도 그 재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 나와 함께 착한 정치를 같이 하려는 자들은 그 지방의 풍토에 마땅한 것을 묻고 농서를 참고하여 농사에 힘쓰면…(백성들이) 우러러 어버이를 섬기고, 굽어 자식을 길러서 태평시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권농교문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 1444년 7월25일) 동양적 자연관은 모든 사물을 천(天) 지(地) 인(人)의 조화로 파악한다. 농업도 하늘(天)의 뜻인 기상, 땅(地)의 의지인 토양, 그리고 이에 순응하는 인간(人)의 노동력이라는 천·지·인 3재(三才)의 합일과 조화라는 관점에서 파악했다. 그러나 가뭄과 폭우 앞에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였고, 그저 하늘의 자비만 바라며 머리 숙여 땅을 파는 존재에 불과했다. 장영실은 이러한 시절에 살았다. 가뭄이 들면 임금이 부덕한 소치라고 여겨 기우제(祈雨祭)를, 비가 너무 많이 오면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던 그런 시대였다. 새로운 왕조의 중흥을 맡았던 세종의 자연관은 달랐다. 세종 역시 농업을 천·지·인의 합일과 조화로 봤다. 그러나 자연조건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체가 되어 운영하고, 장애요인을 농업생산자의 노력과 슬기로 극복하려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연관을 가졌다. 가뭄과 폭우는 반복되는 자연현상이지만 발생시기를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측우기를 이용하면 하늘에서 내린 비의 양을 수량적으로 측정하고 통계적으로 분석해서 장마와 가뭄의 발생시기와 지속기간 등을 예측해 미래에 대비할 수 있다. 단순해 보이는 측우기에는 이처럼 새로운 자연관과 과학적 합리주의가 담겨 있다. 측우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빗물이 땅속에 스며든 정도를 측정해서 강우량을 간접적으로 파악했다. 또 풀뿌리에 스며든 물기를 보고 측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토질에 따라 빗물이 스며드는 양이 달라 간접적인 방법으로 강우량을 알기 어려웠고 통계적으로 활용할 수도 없었다. -발명자-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푼수(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알 수 없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다.' (세종실록 92권 세종 23년 1441년 4월29일). 측우기는 장영실이 만든 대표적인 발명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록에는 세자인 문종이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종은 천문학에 조예가 깊고 즉위 후에는 다연장 미사일의 원조인 화차를 만들도록 한 과학적 소양이 풍부한 임금이었다. 그런 문종이기에 세자시절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는 방안을 곰곰이 생각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실험을 세자의 신분으로 직접 하기는 어렵다. 이해 8월18일자 실록에는 '호조에서 청하옵건대 서운관에서 대(臺)를 짓고 쇠를 부어 만든 길이 2척(414㎜) 직경 8촌(165.6㎜)의 그릇을 대위에 올려놓고 보고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천문관측부서인 서운관이 측우기 제작을 담당했으며, 장영실과 같은 과학기술자들이 관여했음을 의미한다. 또 측우기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한 다음해(1442) 5월8일의 실록에는 측우기의 크기가 최종적으로 길이 1척5촌(310.5㎜) 지름 7촌(144.5㎜)으로 변경되어 있다. 여러 차례의 실험을 거쳐 우리나라의 최대강우량이 310㎜를 초과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폭우때 그릇 안에 든 빗물이 밖으로 퉁겨 나가지 않도록 지름을 줄인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실험과 관찰을 하기 위해 세자를 중심으로 당대의 과학기술자들이 공동 연구를 했으며, 기기제작에 뛰어났고 고향인 부산 동래현에서 농사 경험도 있었을 장영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을 것이다. -원리 및 활용- 측우기의 원리는 장독대에 있는 크고 작은 항아리에 담긴 빗물의 높이가 크기에 관계없이 일정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큰 항아리에는 빗물이 많이, 작은 항아리에는 적게 담겨 그 높이도 다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실험과 관찰로 깨고 새로운 원리를 알아낸 것이다. 또 밑바닥과 주둥이가 똑같은 원통 모양일 때 빗물의 양을 정확히 잴 수 있다는 것도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연세대 나일성 명예교수는 "세계 26개국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우량계의 지름을 조사한 결과 14개국이 측우기와 크기와 비슷한 범주였다"며 "이러한 측정기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실험과 아이디어가 필요하며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자로 꼽히던 장영실도 당연히 참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측우자료는 가뭄과 폭우 대비뿐 아니라 새로운 농지개발사업을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세종은 북방개척으로 얻은 땅을 농지로 개발하기 위해 농업선진지역인 삼남과 후진지역인 북방의 인구를 균등히 배치하는 사민정책을 폈다. 따라서 삼남지방의 강우량과 평안도, 함경도의 강우량을 비교해 해당 지역에 적합한 농작물을 선정하거나 벼와 같은 필수 농산물의 재배에 참고자료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용섭 연세대학교 명예교수(한국사)는 "전국적인 강우량이 다르므로 측우기로 지역별 강우량을 파악하고 통계적으로 분석해 농업정책에 구체적으로 적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선진 농업서였던 원나라의 농상집요(1273)가 강우량이 연간 300~700㎜에 불과한 중국 황하유역의 재배기술을 정리한 것을 알고, 촌로를 포함한 우리 농민들의 경험과 새로운 농업기술을 집대성한 농사직설을 편찬, 보급했다. 또 농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농시(農時)를 알려주기 위해 중국이 금지하고 있던 각종 천문기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였기에 측우자료를 소홀히 하지 않고 백성들의 삶의 기본이자 국가재정의 근본인 농업생산성 증대에 활용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측우기와 함께 강물의 높이로 물의 양과 속도를 알 수 있었던 수표(水標)와 풍기대(風旗臺) 등의 기상관측기기도 농업생산성 증대라는 사회적 필요성과 사람이 주체가 되어 자연을 이용하려한 15세기 우리 조상들의 진취성과 과학성을 잘 보여준다. 다른 발명품과 달리 측우기는 각 도와 군현까지 전국 각 고을에 보급되었고 수령이 직접 자 치 푼(2㎜) 단위까지 정확히 재어서 중앙부서인 서운관에 보고해야 했다. '측우기'라는 용어가 실록에 처음 등장한 세종 24년(1442) 5월8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5월19일이다. 이날을 기리기 위해 5월19일을 '발명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기념식을 갖는다. 장영실은 측우기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이던 자랑스러운 그날, 현장에 없었다. 이해 봄 그가 감독한 임금의 수레가 부서지는 바람에 닷새 전인 5월3일 곤장 80대를 맞고 궁궐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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