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자랑/부산의 과학자

부산의 과학자 장영실 <8> 경복궁 천문대

박영길 2008. 9. 26. 22:37

☞ 부산의 과학자 장영실 <8> 경복궁 천문대 ☜


    "무릇 인사의 동정(動靜)하는 기틀은 실로 해와 별의 운행하는 법칙에 매였고,
    해와 별의 운행은 의상(儀 천체위치관측기기, 象 천체의 모형)을 갖추어야 밝게 나타나므로
    옛 성인들이 반드시 정치하는 도의 첫째 일로 삼았으니,
    요의 역상(曆象 역법을 계산)과 순의 선기(琁璣 천체위치관측기)가 이것이다.
    우리 전하께서 제작하신 아름다운 뜻은 곧 요순과 더불어 법을 같이 하였으니
    천고에 내려오면서 일찍이 없던 거룩한 일이다"(세종 19년 1437년 4월 15일, 세종실록 77권)



    1434년(세종 16년) 경복궁 경회루의 북쪽에 천문대인 대간의대가 준공됐다.
    2년전 세종이 '우리나라의 기준에 맞는 관측기기를 만들라'는 특명을 내린 뒤
    당대의 대학자인 정인지와 정초가 옛 고전을 연구해 별의 운행을 연구하고
    최고의 과학기술자인 장영실과 이천이 주관해서 건설했다.

    실록에는 '경북궁 북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높이 31자(약 9.5m) 길이 47자(14.4m) 너비 32자(9.8m)에 이르고,
    돌로 난간을 두르고 꼭대기에 간의를 설치하고 그 남쪽에 정방안을 부설했다'고 적었다.

    이 천문관측대는 3층 건물 높이에 바닥면적이 40여평이나 된다.
    관측공간은 이보다 작겠지만
    국내 최대 구경인 1.8m 광학망원경이 설치된 보현산 천문대의 4각돔 내부가
    가로 세로 각 8.5m(6.1평)인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큰 규모임을 알 수 있다.


    세종대 천문학자들이 대간의대 옆에 세워져 있던 규표에서 해그림자를 측정하는 상상도<사진 위>

    지난 97년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이용삼 교수가 복원연구를 하고
    한국과학사물연구소가 제작한 세종대의 간의는
    가로 2m48㎝, 세로 3m27㎝, 무게가 5t에 이르는 웅장하고 정밀한 천체관측기기다.<사진 아래>


    간의대에는 주망원경격인 간의가 설치됐다.
    다리 기둥에는 꿈틀거리는 듯 승천하는 용이 새겨지고,
    지름이 최대 1m20㎝에 이르는 6개의 크고 작은 둥근 환(環)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는 왕의 권위를 더해줬다.
    문학자들은 둥근 환을 움직여 별의 위치와 고도를 재고 일식 월식을 예측했다.
    또 별들이 북극을 중심으로 한시간에 15도씩 이동하는 것을 정확히 측정해 밤의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 등
    다른 천문관측기기의 오차를 보전했다.
    간의대에는 간의 외에 필요에 따라 혼천의 등 다른 기기도 함께 놓고 하늘을 살폈다.

    나일성 연세대 명예교수는
    "실록에는 건축을 감독한 사람으로 호조판서 안순 한 사람만 적혀있지만
    정인지 정초 이천 등과 함께 장영실도 참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대왕은 이 천문대를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해
    세자(후에 문종)로 하여금 이순지 김담과 함께 관측을 하도록 당부할 정도였다.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 경회루는 이후 각종 최첨단 천문관측기기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15세기 세계 최고 최대의 천문대로 자리잡게 된다.
    대간의대의 서쪽으로는 그림자의 길이로 1년의 날수와 24절기를 측정하던 규표(길이 26m8㎝, 높이 8m28㎝),
    그 옆에 하늘의 별을 연구하는 혼의와 혼상을 설치한 건물이 들어섰다.
    연못의 남쪽에는 기계식 자동물시계인 자격루, 동쪽으로는 임금의 시계인 흠경각루(옥루)가 세워졌다.

    휴식공간인 인공연못과 연회장인 경회루의 웅장한 건물을 배경으로 들어선 최첨단 천문관측기기의 모습은
    장대하고 장엄했다.
    여기에는 북방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구를 정벌한 새 왕조 조선의 국력과,
    국왕인 세종을 중심으로 뭉쳐진 장영실을 비롯한 당시 과학자들의 자주성과 자신감이 넘쳐 났다.

    전상운 교수(전 성심여대총장·한국과학사)는
    "천문과 역법은 하늘의 아들인 중국의 천자(天子)가 시행하는 영역이고
    변방왕국은 정해진 제도에 따르면 되는 것이 극히 지당한 관례였다"며
    "세종이 이 틀을 벗어나 한양 하늘의 움직임을 스스로 살핀 것은
    종주국을 자칭하던 중국에 대한 조용한 도전이자 민족 자주성의 발현이었다"고 평가했다.

    회루 주변의 천문관측기기는 중국의 것을 기본으로 삼았지만,
    중국에서도 천문기기는 국가기밀사항이어서 실물이나 설계도를 직접 보고 모방할 수 없었다.
    모든 작업을 중국의 천문역법 고전을 읽고 신라시대 이래 우리나라 전래의 기술을 사용해서 만들어야 했기에
    한계가 있었다.
    이를 극복한 것이 장영실이다.

    과학사학자들은
    세종 즉위 초에 천문기술을 익히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장영실이 북경에 체류하면서
    천문관측기기를 접하고 그 원리와 구조를 살폈다가 이때 독창적으로 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영실은 먼저 나무로 간의를 만들어
    중국 북경이 아닌 조선의 서울인 한양의 북극고도(위도)가 38도1/4임을 측정할 수 있게 했다.
    한국외국어대학 박성래(한국과학사) 교수는
    "당시에는 원둘레를 태양이 하루에 1도씩 돌아가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365.25도로 정했다"며
    "이를 360도로 환산하면 37도41분76초가 되어 현재의 측정치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양의 정확한 위도를 알게 되자 이를 기준으로 각종 천문기기 제작이 본격화됐다.

    먼저 청동으로 간의를 만들어 대간의대에 옮겼다.
    대간의대 서쪽에 세워진 규표(圭表)는 해가 머리 꼭대기 위에 떠있는 하지에는 그림자가 가장 짧고,
    멀리 남쪽에서 비스듬히 비추는 동지때 가장 긴 것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표준달력이다.
    음력은 달이 12번 차고지는 것을 1년으로 삼았다.
    음력 1년은 354일이어서 태양이 지구를 한바퀴 도는 365일과 큰 차이를 보여 계절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음력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이같은 문제점은 5천여년 전인 기원전 24세기 요(堯)나라 때부터 제기됐으며
    해를 관찰해서 24절기를 적용한 태음태양력이 오래 전부터 사용됐다.
    세종 과학자들은 13세기 원나라때 만든 규표를 기본으로 삼아 청동으로 높이 8m28㎝의 막대(表)를 세우고
    땅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도록 청석을 다듬어 길이가 26m8㎝인 받침(圭)을 만들었다.
    규면에는 장 척 춘 푼 단위의 눈금을 새겨
    청동막대의 그림자 길이로 1년의 길이(365.2425일)와 24절기를 재었는데
    푼(分)은 현재의 척도로 2㎜이다.

    혼의는 간의를 만들기 전부터 사용된 천체관측의 기본기기이다.
    혼의를 간략하게 만든 것이 간의다.
    혼상은 하늘의 별을 둥근 구형에 표시한 천문의를 말한다.
    경회루 연못가에 설치한 혼의와 혼상은 수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에 연결되어 회전했다.
    이어 자격루와 흠경각루까지 갖춘 경회루 천문대에
    세종은 세자를 데리고 나가 직접 하늘을 관측하고 제왕의 학문인 천문학을 학자들과 즐겨 논했다.

    족 자주성과 국력의 상징인 경회루 간의대를 세종은 노년에 이르러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명한다.
    실록에는 세종이 25년(1443년) 1월부터 7월까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외교마찰을 빚을 수 있는 간의대를 옮기도록 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간의대는 경복궁의 제일 북쪽 귀퉁이로 옮겨졌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세종이 간의대를 옮기도록 말한 시점은
    우연히도 장영실이 감독한 왕의 수레가 부서지고 결국 장영실이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 당한 다음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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