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자랑/부산의 과학자

부산의 과학자 장영실 <9> 해시계

박영길 2008. 9. 26. 22:41

☞ 부산의 과학자 장영실 <9> 해시계 ☜



    '처음으로 앙부일귀(仰釜日晷)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해그림자로 시각을 알도록 했다.
    무릇 모든 시설에 있어 시각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밤에는 경루(更漏 물시계)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를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으니 모양이 가마솥(釜)과 같다.
    지름에 뾰족한 침(영침)을 설치하여 움푹 패인 곳에서 (영침의 그림자가) 돌며 시각을 알리도록 했다.
    시계판에 글자 대신 12지신을 그려놓은 것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해그림자가 (12지신을 가리키니)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길가에 설치해 놓으니 구경꾼이 모여든다.
    이로부터 백성들도 이것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세종실록 66권 세종 16년, 1434년 10월2일)

    세종실록에는 세계 최초의 공중 해시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시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궁궐과 사원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혜정교와 종묘거리에 제왕의 기기를 설치토록 허용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문자판에는 한문 대신 12시(時)를 나타내는 12지신 동물의 그림을 그려 넣어
    백성들이 시각을 쉽게 알 수 있게 배려까지 했다.

    '이로부터 백성들도 이것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궁중과학자가 개발한 기기를 일반인에게 공개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쓰도록 허용한,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미 500여년 전에 과학 대중화, 과학의 생활화를 구현한 것이다.
    과학 대중화에 성공한 나라가 과학기술에 앞선 나라임을 앙부일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세대 나일성(한국천문사) 명예교수는
    "앙부일귀는 세종의 과학이 철저하게 백성들의 편에 선, 백성을 위한 과학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반구형의 이 오목해시계는 1434년 10월 2일 세상에 선을 보였다.
    다른 천문기기와 마찬가지로 장영실이 참여해서 만든 또 하나의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국가표준시계인 자격루가 이해 7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혼천의와 간의가 만들어진 바로 그 해다.
    장영실은 내친 김에 글을 모르는 무식한 백성들도 쉽게 시간을 알 수 있도록 그림문자로 된 오목해시계를 만들어
    세종에게 바쳤다.
    시간뿐 아니라 날짜판이 있는 손목시계처럼,
    오목한 그릇 안에 비친 해그림자로 절기(날짜)까지 알 수 있도록 만든 달력 겸용 시계이다.

    전상운 전 성심여대총장(한국과학사)은
    "앙부일귀는 원나라의 곽수경이 만든 앙의(仰儀 하늘의 움직임을 쳐다보는 기기)에서 그 원리를 찾을 수 있으나
    해시계로서의 앙부일귀는 세종 때 천문학자들과 이천 장영실 등의 창조적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앙부일귀와 같은 해시계가 원나라 때는 물론 명나라 때도 만들어진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 해시계는 조선왕조와 함께 19세기말까지 그 전통이 계승 발전되었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 디자인과 정밀성으로 인해 궁궐과 관공서, 사대부 집안에서는
    정원에 화강암 대석을 세우고 그 위에 이 해시계를 설치해 권위와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삼았다.
    어떤 것은 선과 글자를 은으로 상감하여 새겨 넣고 시침은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으로 형상화해 멋을 냈다.

    상아나 자기로 성냥갑보다 작게 만든 휴대용 앙부일귀에는
    오목한 해시계판과 함께 남북방향을 정확히 맞출 수 있도록 지남침판도 설치했다.
    선비들이 소매 속에 지남침이 달린 휴대용 해시계를 넣고 다니다가 천천히 시각을 보는 모습에는
    여유와 풍류가 담겨 있다.

    포항공대 정혜경(과학사) 박사는
    "왕이 아닌 일반 백성들까지 시계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에서도 17세기가 지나야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백성들이 앙부일귀를 모방해서 만들도록 허용했기에 민간에서는 이를 끊임없이 계승 발전시켰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휴대용과 장식용 등 다양한 용도로 만들어지고,
    구리 자기 상아 대리석 등 다채로운 소재로 다듬어져 정밀 공예품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더했다.
    과학이 품위 있는 문화를 만들고, 과학기술 자체에 예술적 가치가 더해진 대표적인 과학문화유산으로
    고려자기(瓷器)와 함께 조선의 해시계 '앙부일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앙부일귀는 오목한 그릇 안에 시각을 나타내는 선뿐 아니라 24절기를 나타내는 선도 그어져 있다.

    시간선은 앙부일귀의 위에서 아래로 그어진 수직선들이다.
    밤에는 해가 없으므로 시간선은 아침 해가 뜨는 오전 6시(묘 卯)부터 해가 지는 저녁 6시(유 酉)까지 선을 그었다.
    각 시는 초(初)와 정(正)의 두 선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각각 4등분해 각(刻)으로 정했다.
    매 시는 현재의 시간으로 2시간이다.
    각은 이를 8등분한 것이므로 1각을 나타내는 선들은 15분 간격으로 그어진 셈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시간개념은 아마 15분 간격을 기준으로 했을 것이다.
    해가 가장 높이 솟는 오정(午正, 뒷날 정오)에 이르면
    영침의 그림자는 중앙의 자오선(子午線, 자정과 정오를 연결한 남북선)을 정확히 가리킨다.

    계절선은 가로로 그어진 선들이다.
    그림자는 해가 우리 머리꼭대기에 떠 있는 하지 때 가장 짧고 동지 때 가장 길다.
    그림자의 길이, 즉 해의 고도가 계절 따라 변하는 간단한 원리를 이용해 오목한 그릇 안에 절기를 함께 나타냈다.
    동지에서 하지까지 24절기는 13개의 가로선으로 표시했다.
    24절기 중 하지와 동지를 뺀 22절기는 춘분과 추분처럼 그림자의 길이가 1년에 두번씩 똑같아지므로
    11개의 선으로 나타냈다.
    이 선과 시계의 문자판이 만나는 곳에 해당되는 절기가 적혀있다.

    앙부일귀를 설치할 때는 영침이 해의 반대방향인 북쪽을 향하도록 한다.
    영침의 기울어진 각도는 관측지점의 북극고도(그 지방의 위도)와 같다.
    조선시대의 영침은 임금이 살던 한양의 위도와 같은 38도1/4(현재의 도수로 37도41분76초)에 맞춰
    전국적으로 시간을 통일시켰다.
    만일 부산에 해시계를 설치한다면 영침의 기울기를 부산의 위도인 35도6분으로 맞춰야 정확한 시각을 잴 수 있다.

    영침의 끝은 원의 중심이며 높이는 수평면과 일치하게 만든다.
    앙부일귀는 이처럼 간단한 원리로 시각과 절기를 동시에 알 수 있는 실용적 해시계였다.

    세종 때에는 앙부일귀 외에 현주일귀 정남일귀 천평일귀 등 3개의 다른 해시계도 만들어졌다.
    이 해시계는 시각만 재는 평면해시계였다.
    장영실 등이 만든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해시계와 별시계를 겸한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밤과 낮의 시각을 하나의 그릇으로 알 수 있는 기기를 만들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고,
    밤에는 별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1시간에 15도씩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시각을 잴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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