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종 때에는 비단 장영실뿐 아니라 무관 출신의 뛰어난 공학자 이천과 문관인 정인지 정초 김담 등 과학기술 이론가들이 제각각의 능력을 발휘해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가꾸고 그 힘을 바탕으로 국방을 공고히 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 자신이 과학자이기도 한 세종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다. 세종이 경복궁안 간의대에서 장영실등이 만든 대간의를 살펴보는 모습. 세종은 독자적인 천문관측기기 제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장영실이 세종을 만나는 극적인 순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세종 5년 상의원 별좌(종5품)에서 출발하여 세종 24년 상호군(정3품)의 자리에서 파면되기까지 20년간에 걸친 그의 공적 활동에 국한되어 있을 뿐 출생과 성장과정 말년 등은 베일에 가려 있다. 그의 출생연도와 나이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어린이 위인전 등에는 동래관노로 있던 장영실이 10대에 발탁돼 궁중 과학자가 된 것으로 종종 나온다. 이에 대해 한국외국어대 박성래 교수(과학사)는 "그의 재능을 처음 간파한 사람이 태종(1367~1422)이었고 그의 활약이 세종3년(1421)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미뤄 그는 1390년 전후에 태어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실록에 등장할 때 그의 나이는 이미 30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연려실기술에도 '장영실이 세종 5년(1423) 궁중에 의복 등을 공급하는 관청인 상의원 별좌에 등용된다'는 기사가 나온다. 상의원 별좌는 종5품으로 장영실이 관노로 있던 동래현령의 벼슬과 거의 같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동래현에서 막 데려온 장영실에게 줄 수 있는 벼슬이 아니다. 선교사 출신의 천문학자 W C 루훠스는 1936년 발간한 그의 저서 '한국천문학'에서 '세종은 부왕인 태종과 더불어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물시계를 만들었는데 아마 장영실이 옆에서 이들을 도왔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점으로 미뤄 장영실은 20세 전후까지 동래현에서 지내다가 태종 때 궁중에 들어갔으며, 세종이 세자였던 시절부터 그를 도와 여러 기기를 만드는 일에 종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세종이 즉위한 뒤에는 왕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남양부사 당평부사 등과 함께 궁중 과학자의 신분으로 중국 유학을 다녀오고 기기제작의 책임자로 중용됐음을 엿 볼 수 있다. 장영실은 그를 후원해 준 세종에게 기계식 자동물시계인 자격루(세종 15년 1433), 하루의 시간과 계절의 변화까지 한꺼번에 보여주는 임금의 물시계인 옥루(玉漏·세종 20년 1438), 혼천의 대간의 소간의 등 각종 천문관측기기(세종 19년·1437)를 만들고 세자인 문종을 도와 측우기(세종 23년·1441)와 수표(1441년으로 추정)를 고안했다. 세종 또한 관노 출신인 그가 자격루를 만들자 종4품인 호군으로, 이후 대호군(종3품) 상호군(정3품)의 벼슬을 주고 격려해 당대의 과학기술을 세계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현재의 과학기술부 차관(정2품) 바로 아래 벼슬까지 진출한 장영실의 생애에 대한 또다른 궁금증은 그가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이다. 현재로서는 그의 출신가문과 연관해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장영실의 본은 충청남도 아산. 현재 전국적으로 5천 가구에 불과한 아산 장(蔣)씨는 단일본으로 중국 송나라 때의 대장군 장서가 시조다. 장서는 금나라의 침입에 맞서 주전론을 주장하다가 좌절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고려의 아산에 도착한다. 고려 예종(1079~1122)은 그에게 아산을 식읍으로 주고 우대했으며 그의 집안은 이후 고려조에서 무인으로 높은 벼슬을 지낸다. 장영실의 허묘(쿟墓 : 시신이 없는 무덤)가 아산에 있고, 아산시가 시민의 날인 10월26일을 장영실 기념일로 삼는 것도 이같은 인연에서 비롯됐다. 장씨 세보(世譜)에 영실은 9대손으로 나오며 사촌들도 영(英)자 돌림이 많고 김씨 성을 가진 집안에 시집간 여형제가 1명 나타난다. 아버지의 이름은 성휘로 5형제 중 셋째이며 이들 형제가 모두 고려 때 장관급인 전서(典書) 벼슬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그의 사촌매제가 세종 때 집현전 학자이자 그와 함께 천문관측기기 제작에 간여한 김담(훗날 이조판서를 지냄)으로, 조카 중 장흥부는 동래현감을 지낸 것으로 나타난다. 세보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동래부지(誌)를 확인했지만 태조에서 연산군 때까지 114년간의 기록은 소실되고 없었다. 다만 족보에 나타난 아산 장씨의 15대손 장명원이 1550년11월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1553년 3월 현직에서 사망했으며 시호가 동래공이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건국대 남문현 교수는 "단일본인 장씨 세보를 참고할 때 장영실이 아산 장씨 집안의 서자임을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만일 장영실이 '중국 상인의 아들' 또는 '고려에 충성하다가 몰락한 집안'일 경우 장씨 일가가 조선 전기에 벼슬길에 오르기는 힘들 것이다. 남 교수는 "역설적으로 장영실이 고려에 귀화한 무인 집안의 서자 출신이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태종도 그의 내력을 알고 발탁했으며 세종도 중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장영실이 아산의 명신으로 나오지만 그가 낙향해 말년을 보낸 곳은 경북 의성일 가능성이 높다. 아산장씨대종회 장계환 회장(71·부산 강서구 송정동)은 "4대 선조가 의성군으로 봉해진 고려 왕실의 외척 집안으로 혼인하면서 근거지를 의성으로 옮기고 이후 자손이 번성하면서 의성을 중심으로 영천 청송 밀양 등 영남지방에 기반을 잡게 됐다"고 말했다. 의성군 송내리에는 아산 장씨의 재실이 있으며, 점곡면 사촌리에는 족보에 따르자면 영실의 작은 아버지인 문익공 장성발의 묘가 있음도 확인됐다. 실록(세종 20년·1438년9월15일)에는 '장영실이 경상도 채감별감으로 나가 창원 울산 영해 청송 의성 등 각 읍에서 생산된 철과 동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어 4년뒤 1442년 관직에서 쫓겨난 그가 일가들이 거의 없는 아산보다는 연고가 있는 경북 의성에서 말년을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장영실의 사망연대는 1445년 전후로 추정되며 1390년에 태어났다고 볼 때 55세 전후에 사망한 것이 된다. 장영실은 왕의 수레가 부서졌다는 단 한번의 실수와, 때마침 경기도 이천에 있는 행궁(行宮 임금의 별궁)의 부실공사 관련자와 함께 처리돼 가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 세종은 이러한 그의 죄를 감형시키려 노력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후 그를 다시 부르지 않은 것은 이미 장영실이 노년에 접어들었거나 사망했기 때문으로 과학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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